몇년 전 국내 한 대기업 본사와 계열사 등에 국세청 조사요원들이 들이닥쳤다. 직원들이 부동자세로 대기하는 동안 요원들은 책상 서랍과 금고를 열고 회계장부를 모두 압수했다. 국세청은 3개월여 뒤 계열사와 오너 일가에 수천억원의 탈루세액을 추징했다.
그러나 거액의 세금을 추징당하고 탈세 혐의로 검찰에 고발된 오너 일가는 불과 8개월여 만에 자유의 몸이 돼 자연스럽게 경영에 복귀했다.
세무조사는 세법질서 확립을 위한 ‘마지막 보루’로 불린다. 신고 단계에서 잡히지 않는 탈세 행위를 적발, 납세자들의 성실 납세를 유도하고 탈세를 줄이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소속 김효석 의원(민주당)은 “‘탈세를 하면 망한다’ ‘나도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 세무조사는 탈세범에 대한 처벌 수위가 낮고 세무조사의 공정성, 불투명성 논란으로 ‘재수없어 걸렸다’는 식의 불신만 키워왔다”며 “일벌백계주의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무조사의 공정성 논란=세무조사에 대한 납세자들의 불신은 세무조사 대상 선정에서부터 조사과정, 사후처리 등이 투명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 관련 정보가 공개되지 않고 자의적인 판단을 배제할 수 있는 법제화된 시스템 구축이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미국의 경우 세무조사 대상자를 과학적으로 선정하기 위해 ‘납세자순응도 측정 프로그램(TCMP)’과 ‘조사대상자선별제도(DIF)’를 활용하고 있다. TCMP는 전체 납세자 중에서 일정비율을 무작위 추출한 뒤 강도높은 세무조사를 통해 탈세수준을 파악하는 제도. 이를 통해 구축된 탈세자료는 개인납세자의 특성별 탈세 수준에 대한 정보를 여러가지 통계분석 기법으로 파악해 세무조사 대상자를 선정하는 DIF의 기초자료로 제공된다.
국세청도 세무조사의 정치적 오·남용 논란 등을 감안해 특별세무조사를 없애고 각종 자료를 전산에 입력, 전산 분석을 통해 조사 대상을 선정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러나 선정 기준에 대해서는 담당자 정도만 알 정도로 보안을 유지하고 있다. 또 세무조사가 부동산 투기억제 정책, 과외 금지 등 다른 정책 수단으로 활용되거나 경기가 좋을 때는 강하게, 나쁠 때는 느슨하게 하는 식으로 경기 상황과 연계해 이뤄져 객관적이고 일관된 원칙이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세무조사 처리 과정의 투명성 확보도 과제다. 수도권에서 대형음식점을 운영하는 한모씨는 올 초 세무조사에서 4억원가량의 탈세건에 적발됐지만 세무대리인을 통해 추징세액을 1억원으로 낮췄다고 말했다. 조세전문 변호사인 백모씨는 “외국의 경우 향후 소송에 대비해서라도 세무대리인들이 세무조사 과정을 참관하는 게 기본이지만 우리의 경우 (추징금을 깎아 달라는) 로비와 청탁에 매달리는 경우가 더 많다”고 주장했다.
#걸릴 확률 낮고 처벌도 ‘솜방망이’=세무조사 비율(전체 납세대상인원 대비 세무조사 대상인원)은 지난 5년간 모든 세목에서 계속 낮아졌다. 종합소득세는 1999년 0.65%에서 2003년 0.21%, 법인세는 2.36%에서 1.37%, 양도소득세는 2.53%에서 1.15%, 부가세는 0.26%에서 0.17%로 각각 낮아졌다. 〈표 참조〉 이 같은 세무조사 비율은 개인사업자의 경우 미국 1.76%(2002년 기준)에 비해 낮은 편이며, 법인도 미국 2.05, 독일 3.46, 영국 10∼15% 등과 비교해 크게 낮아 세무조사의 효과를 떨어뜨린다는 분석이다.
한국조세연구원 김형준 연구위원은 “미국과 우리나라의 개인사업자 소득세 세무조사 비율과 추징세액 비율을 비교하면 미국은 세금 탈루가 적은데도 불구하고 세무조사 빈도가 높은 반면에 우리나라는 세금 탈루 규모는 큰 데 조사 빈도는 낮다”고 말했다.
허위 계산서를 발급하거나 거래해 개인 사업자들의 탈세 통로로 활용되는 ‘자료상’은 국세청의 집중 단속 대상이지만 줄지 않고 있다. 지능적 탈세범인 이들은 수천만∼수억원의 수수료를 챙긴 뒤 적발돼 몇달이나 1년여 감옥 신세를 져도 남는 장사라고 여긴다는 것. 국세청의 자료상 단속 현황을 보면 2000년 860명에서 2001년 1321명, 2002년 1560명, 2003년 2511명으로 매년 늘고 지난해 부과세액이 1조5539억원에 달한다.
재경위는 자료상에 대한 처벌 수위가 낮다는 지적에 따라 최근 법안심사소위에서 처벌을 2년 이하 징역에서 3년 이하로 강화한 조세범처벌법 개정안에 잠정합의했다.
탈세범에 대한 처벌 수위가 낮은 건 현행 세무조사의 주목적이 세금추징에 있기 때문이다. 형사처벌의 경우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과 조세범처벌법에 의거, 포탈세액에 따라 최고 무기징역까지 선고할 수 있지만 실제로 인신구속을 당하는 경우는 드물다. 죄질이 중할 경우 징역형에 처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보석, 사면 등을 통해 사회로 복귀한다. 탈세범으로 낙인 찍히면 정상적인 사회활동이 불가능한 미국과는 천양지차다. 탈세 행위가 보편화돼 있다 보니 탈세범에 대한 잣대가 약하고, 이것이 또 다른 탈세를 낳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구재이 참여연대 조세개혁센터 실행위원(세무사)은 “그동안 고소득 자영업자나 전문직 종사자들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의도적인 매출 누락과 허위 경비 계상 등의 탈세수법이 수없이 드러났지만 이들이 형사처벌됐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며 “이 같은 ‘솜방망이 처벌’이 탈세를 조장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말했다.
특별기획취재팀=황정미·민병오·황계식·이강은 기자 finders@segye.com
세무조사와 탈세에 관한 정보가 납세자의 소득신고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국조세연구원 김형준 연구위원은 이달 초 아주대 학생 20명을 상대로 세무조사와 납세 순응행위(실제소득에 가깝게 세금신고를 하는 행위)에 관한 실험을 가졌다. 세무조사에 관한 정보와 다른 학생들의 탈세행위에 관한 정보의 공개 여부에 따라 학생들의 소득신고 수준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측정한 것이다. 실험은 6가지 환경으로 나눠 각 6차례씩 진행됐다. 첫번째 환경은 세무조사 비율에 대해 전혀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두번째 환경에서는 세무조사 비율이 높거나 낮을 수 있다고 부분 설명하고, 세번째는 정확한 세무조사 비율을 알려줬다. 4∼6번째 환경은 다른 납세자의 탈세 정보에 관한 것으로 역시 정보를 제공하지 않은 경우, 부분 정보만 제공하는 경우, 정확한 탈세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로 나눴다. 모든 학생은 2만∼4만원의 돈을 받아 실험에 참여하고 각기 주어진 환경에 따라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수준만큼 소득을 신고해 일정 세금(소득세율 20%)을 납부했다. 세금을 내고 난 뒤의 소득이 학생들이 실제 얻는 이득이다. 조사후 전체 학생의 5∼15%를 임의로 선정해 세무조사를 벌이고 과징금(가산세율 100%)을 물게 했다. 실험조사 결과 아무런 정보도 제공받지 못한 환경에서 실제소득에 가깝게 신고한 비율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세무조사 비율이나 다른 사람의 탈세행위에 관한 정보를 얻은 환경에서 오히려 실제소득보다 낮게 신고해 탈세한 비율이 높았던 것이다. 탈세에 관한 정보를 많이 가질수록 세금신고를 제대로 할 가능성이 클 것이라는 일반적 예상과는 다른 결론이다. 김 위원은 이같은 결과를 두 가지로 해석했다. 하나는 세무조사 비율이 참가자들이 생각하는 수치보다 낮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다. 세무조사 비율이 예상보다 낮다고 생각하면 세무조사가 소득신고를 높이는 유인책이 못된다는 얘기다. 다른 하나는 타인의 탈세 정보가 심리적 안도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뿐 아니라 대부분이 소득신고를 낮춘다고 판단, 소득신고를 제대로 하지 않는 성향이 있다는 설명이다. 김 위원은 “세무조사 비율이나 탈세에 대한 정보가 모두 납세자들의 순응행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왔다”며 “의미나 배경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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